
전혀 모른 두 청년 미국 페리 두부 총격 사건
안녕하세요
과한 역사 사관입니다.
안중근 의사보다 먼저 일어난 해외 무장독립운동?
무엇이 우리 국민을 분노하게 만들었기에 총을 든 것일까요?
얼굴도 이름도 모르던 두 청년이 한 곳에서 같은 분노를 가지고 거사를 준비합니다.
[전명운과 장인환 스티븐스 저격 사건의 기록]
1908년, 조선은 이미 외교권을 빼앗긴 상태였습니다. 을사늑약 이후 대한제국은 국제사회에서 사실상 발언권을 잃었고, 일본은 조선을 보호국이라는 이름 아래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미국 땅에서 직접 행동에 나선 두 명의 청년이 있었습니다.
페리 부두 스티븐스 저격 사건 바로 전명운과 장인환 의거 기록을 정리했습니다.
[과연 스티븐스는 누구인가?]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는 1904년 대한제국 외교 고문을 지냈으나, 실질적으로 조선 지배를 국제사회에 정당화하는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었습니다.
1908년 미국 신문사들과의 인터뷰에서 “일본이 조선인들을 보호해 주는 것이며 환영하는 분위기였다고, 또한 을사조약이 미개한 조선인을 위해 이루어진 조치”라며 일본의 식민지 정책을 옹호하는 있을 수 없는 막말을 합니다.
이 기사를 보고 당시 해외에 있던 한인들은 큰 충격과 분노에 쌓입니다. 특히 미국의 한인들은 스티븐스의 발언에 왜곡된 내용이라며 강력하게 항의했지만 그는 바꾸지 않았습니다.
[전명운과 장인환 의거 결심]
이 사건의 주체는 전명운과 장인환이었습니다.두 사람은 당시 미국에서 거주하던 이주 노동자였고 스티븐스의 기자 회견 내용에 울분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두 사람은 나라를 잃어가는 이 부당한 현실을 더는 지켜 볼수 없었기에 최후의 수단으로 그를 처단하고자 행동을 계획합니다.
1908년 3월 2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페리 부두
스티븐스가 이동하는 순간 , 두 청년의 총구는 그를 향해 겨누고 있었습니다.
스티븐스를 먼저 기다리고 있던 전명운이 방아쇠를 당깁니다.
그러나 방아쇠에 붕대가 감겨 불발!
하지만 전명운은 손에 있는 총으로 스티븐스를 가격하고 몸싸움을 벌입니다.
때마침 부두에 기다리고 있던 또 다른 청년 장인환!
장인환은 스티븐스을 향해 세 발의 총을 쏩니다.
한 발은 전명운의 어깨에, 또 한 발은 스티븐스 몸통에, 마지막 한 발은 스티븐스 허리로 들어가 사타구니에 박힙니다.
전명운은 총상으로 치료를 받고 재판에 송치되었으며 스티븐스는 이틀 뒤 상처의 염증으로 인해 사망하게 됩니다.
그로 인해 평화 시위가 아닌 무장독립운동의 시발점이 됩니다.
[미국 법정 앞에 선 두 청년]
의거 직후, 도주하지 않고 체포됩니다.
그들을 위해 한인 사회에서 의연금을 모아 변호인단을 구성해서 대응했고 스티븐스의 모든 만행을 자료 제출하며 조국을 지키기 위한 정치적 상황에서 벌어진 사건이고 조선 외교관 박탈과 일본의 침약, 을사늑약의 강재성을 공개적으로 알리게 됩니다.
전명운은 살인미수 및 불법 무기 소지는 했지만 스티븐스에게 치명상이 아니었고 불발이라는 점을 강조해 무죄를 받았으며 장일환은 ‘애국적 환상에 사로잡혀 저지른 범죄’라고 표현하며 법과 질서 유지를 위해 살인이 인정되어 징역 25년형을 선고 받습니다.
이후 복역 중 모범수로 4번의 신청 끝에 1919년 10년 만에 가석방으로 출소하게 됩니다.
[이 사건에 대한 의미]
스티븐스의 의거는 이후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를 포함해 여러 독립운동에 무력 투쟁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또한 이 사건에 재판을 통해 조선인의 정치적 동기와 일본의 침략 실상이 공식적으로 언급되었고,국제적으로 조선의 문제를 바라보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외국 노동자였던 두 청년의 위대한 거사로 인해 을사늑약과 정미조약의 부당성을 국제적으로 알리며 한인들의 독립투쟁이 전 세계인에게 전해진 것이었습니다.
[나의 사견]
매번 위대함과 감사를 주는 독립운동의 이야기 중 하나이지만
먼 미국에서 일하던 두 청년은 서로 이름도 얼굴조차 몰랐습니다.
하지만 조국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같은 마음과 스티븐스의 말도 안 되는 기자 회견은 서로가 같은 분노로 끓어오르게 했고 같은 장소에 모이게 했으며 같은 위대한 행동으로 움직입니다. 이 드라마 같은 이야기에 너무나 감동스러웠습니다.
기사 1면에 페리 부두 총격 사건에 대해 실리며 국제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해외 있지만 나라에 대한 애국심은 같았다는 사실에 감사드리며 1908년 3월 23일을 기억 보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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